저는 가방 정리를 거의 안하고 삽니다.
그러니까 뭔가 필요한게 있으면 가방속에 집어넣은뒤, 사용하고나서 그것을 가방속에서 꺼내지를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것은 아니고 그냥 생활습관입니다.
그 수준이 어느정도였냐 하면.
고등학교 3학년때 학교 선생님이 수업을 하다가 "야 혹시 너희들 고1때 쳤던 도덕시험 문제 기억하는 사람 있나? 그때 쳤던 시험문제랑 똑같은 유형이야" 라고 했을때 제가 책가방에서 고1때 쳤던 시험지를 꺼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가방속에 완전히 별의 별게 다 있습니다. 칼이나 가위, 풀은 기본이고 어릴때부터 쳤던 시험지에 모의고사지, 자잘구레한 노트와 프린트물, 학년초마다 필요한 증명사진에다가 뭐 나머지 기타등등 개인적인 물건까지.. 솔직히 저도 "가방속에 이러이러한게 들어있다" 정도만 기억하는거지, 그걸 꺼낼려면 제 가방을 펼쳐놓고 수색이라는 작업을 한번 더 해야 할 지경이니 가방 상태가 어떠할런지 이정도쯤 설명하면 대충 짐작이 가겠지요.
그런 제 가방이다보니 아무래도 호기심을 가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재미삼아서 몇번 뒤지다가 옛날 성적표나 시험지를 발견하고 이런저런 물건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하는 소리가 "야, 이거 완전히 보물상자인데?" 라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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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점심시간마다 학교 컴퓨터실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었습니다. 다른애들 모두 노는 시간에 동아리활동하러 컴퓨터실에 가는거니까 교실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점심시간에 동아리활동을 하고나서 교실로 돌아오면 가방을 뒤진 흔적이 있는겁니다. 항상 가방 지퍼를 일정한 방향으로 잠궈놨는데 지퍼가 잠긴 방향이 평소랑 다른겁니다. 가방속을 뒤져보니 안에 있는 책 배치도 미묘하게 제가 평소 해놓았던 배치모양과 달랐습니다.
처음 한두번이야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록 지속적으로 매일 점심시간마다 제 가방을 타인이 뒤적거린 흔적이 있는겁니다. 이쯤하니 저도 짜증이 나더군요.
"남의 가방 뒤지지 마라."
연습장 종이를 북 찢어서 가방속 지퍼를 열면 보일만한곳에 갖다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몇일이고 계속해서 가방을 뒤진 흔적이 보이더라구요. 안 그래도 가방 상태가 영 어지러운 판국이라, 뭐 하나 없어져도 제가 바로 눈치를 챌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런 판국에 가방을 열때마다 물건배치가 뒤바뀌어있으니 왠지 뭔가 잃어버린것같은 기분에 내 물건을 타인이 만진다는 불쾌감이 겹쳐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씨발놈아 남의가방 자꾸 뒤지지 마라."
찢은 연습장 종이에다가 열받고 빡치는 심정을 그대로 담아서 그전처럼 가방에 넣어놨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또 누군가 가방을 뒤진 흔적이 보이더니 가방에 넣어놓은 연습장 조각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아무도 제 가방을 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저는 제 경고가 상대에게 먹혀들어갔다는 사실에 만족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시간을 따지면 1년 6개월정도 지났을겁니다.
친한 친구에게 제 가방을 보여줬습니다. 그 친구는 가방 상태를 보더니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제 가방속을 뒤지기 시작하는겁니다.
"야, 니 가방 완전히 보물상자다."
"어. 그런 소리 자주 듣는다."
"아니, 이것 좀 봐라. 와 고1때 쳤던 시험지가 아직도 남아있네? 야 시발 니 옛날 성적 꽤 좋네? 와나 호치키스도 있어 푸하하하"
"야. 작작 꺼내라. 나중에 다시 집어넣기 힘들다..."
..
"푸하하하하하, 하, 킄, 크하하하하하하하, 푸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야가 갑자기 와 이러노?"
"푸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아 나 미치겠어 아오 크하하하하하하하"
"야, 야, 왜이러는데? 내 가방이 그렇게 웃기나?"
"아흐흐흐하하하하하하하 아놔 아 하 하.. 하하하하.. 야, 니가 직접 봐라. 아오 진짜 푸하하하하하하하"
라고 하면서 친구가 가방속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조각을 주는겁니다.
먼지가 여기저기 눌러붙어서 거무튀튀하게 때가 눌러붙은채로 꼬깃꼬깃 접혀있던 종이를 펼쳤습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씨발놈아 남의가방 자꾸 뒤지지 마라."